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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 난설재,초희,옥혜 (팔방미인 천재시인의 묘소를 방문하다.)

세턴20 2026. 9. 23. 19:22

어제 경기도 광주에 있는 허난설헌 묘를 직접 찾아갔다가, 저도 모르게 한참을 명상에 잠긴체 서 있었습니다.

27세에 생을 마감한 천재 시인이자 화가.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여류 문인임에도 불구하고 결혼 이후 불행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던 허난설헌의 삶이, 맑고 높은 가을 하늘 아래서 유독 더 선명하게 느껴졌습니다.



허난설헌, 난설재,초희,옥혜 (팔방미인 천재시인의 묘소를 방문하다.)
허난설헌, 난설재,초희,옥혜 (팔방미인 천재시인의 묘소를 방문하다.)
허난설헌, 난설재,초희,옥혜 (팔방미인 천재시인의 묘소를 방문하다.)
허난설헌, 난설재,초희,옥혜 (팔방미인 천재시인의 묘소를 방문하다.)

 

 

 

 

허난설헌의 어린 아들과 딸을 연이어 떠나보낸 비통한 심정을 담은 대표작입니다.

 

 

곡자(哭子 - 자식을 잃고)

 

작년에는 사랑하는 딸을 여의고 (去年喪愛女)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까지 잃었구나 (今年喪愛子)

 

슬프고 슬픈 광릉(廣陵) 땅에

 

두 무덤이 마주 보고 나란히 서 있네 (哀哀廣陵土 雙墳相對起)

 

처량한 너희 형제의 혼령은 (應知弟兄魂)

 

밤마다 서로 쫓아 노니는가 (夜夜相追遊)

 

제비꽃 찬 바람 속에서 지고 (지전화풍(紙錢花風) 낙(落))

 

묘지 숲엔 도깨비불만 쓸쓸하구나 (오동우우(梧桐雨雨) 성(成))

 

세상에 다시없는 슬픈 이 마음을 (조아유한극(竈下有恨極))

 

피눈물로도 다 못 채워 곡소리만 삼키네 (혈성막부리(血成莫復理))

 

 

27세에 붓을 놓다 — 천재 시인의 삶

혹시 이런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신지요. 재능이 넘치는 사람이 가장 불행한 시대, 가장 불리한 조건으로 태어난다면 어떤 삶을 살게 될까 하고요. 저는 허난설헌을 알고 나서 그 질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허난설헌의 본명은 초희(楚姬), 또 다른 이름은 옥혜(玉惠)라 전해집니다. 호는 난설헌(蘭雪軒) 또는 난설재(蘭雪齋)라 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여성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이 금기시되어 '난설헌 허 씨'처럼 호로 불리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여기서 호(號)란 본명 외에 따로 짓는 아명(雅名), 즉 문인이나 학자가 스스로를 나타내기 위해 쓰는 별칭을 말합니다. 지금으로 치면 필명이나 아티스트 네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명종 18년인 1563년에 태어나 선조 22년인 1589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27세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한창 꽃다운 나이에 요절(夭折)한 셈입니다. 여기서 요절이란 재능과 가능성이 충분히 꽃피기 전에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하는 것을 뜻하는데, 허난설헌의 삶이야말로 그 단어가 가장 아프게 적용되는 경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려서부터 신동(神童)이라 불렸던 초희는 오늘날 기준으로 영재(英才) 수준의 글재주를 지녔고 용모 또한 빼어났다고 전해집니다. 아버지 허엽은 딸의 재주를 알아보고 직접 시문(詩文)과 서예, 그림을 가르쳤으며, 오빠들이 글을 배울 때도 함께 배울 수 있게 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 오빠 중 한 명이 바로 『홍길동전』을 집필한 허균입니다. 이런 가정환경이라면 당연히 재능이 만개했을 것 같지만, 결혼 이후의 삶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남편 김성립은 문과에 급제하긴 했으나 부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시어머니에게도 구박을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자식들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오빠는 율곡 이이를 비방하다 귀양길에 올랐으며, 허균 역시 귀양을 가는 등 집안에 불행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어땠을까요. 제 솔직한 생각으로는, 허난설헌은 문단과 예술계를 넘나드는 걸출한 창작자로 이름을 날렸을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 본명 초희(楚姬), 별명 옥혜(玉惠), 호는 난설헌(蘭雪軒)·난설재(蘭雪齋)
  • 1563년(명종 18) 출생 — 1589년(선조 22) 향년 27세로 요절
  • 아버지 허엽에게 시문·서예·회화를 직접 사사(師事)
  • 남편 김성립, 시어머니의 냉대, 자식들의 연이은 죽음으로 만년을 비통하게 보냄
  • 동생 허균은 훗날 『홍길동전』을 집필한 조선 최고의 문제적 문인
요약: 허난설헌은 1563년 태어나 27세에 요절한 조선 중기 최고의 여류 시인으로, 탁월한 재능에도 불구하고 결혼 이후 불행이 겹치며 비통한 삶을 살았습니다.

 

 

선비석
선비석
김성립의 묘
김성립의 묘

 

맑은 가을날, 경기도 광주 묘소를 직접 찾다

40도가 넘는 폭염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하늘은 높고 바람은 시원합니다. 애국가 3절 가사처럼 "가을 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날이었습니다. 이런 날씨에 가만히 있기가 아까워서 저는 경기도 광주에 있는 허난설헌 묘소를 찾아 나섰습니다.

제가 직접 가봤는데, 묘소는 생각보다 단정하게 잘 관리되어 있었습니다. 벌초가 말끔히 되어 있었고 묘역 주변 정돈 상태도 나무랄 데 없었습니다. 그런데 묘비 옆에서 예상 밖의 장면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남편 김성립의 묘가 허난설헌 묘 옆에 나란히 모셔져 있었던 것입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살아생전 그토록 불행한 부부 관계였는데, 저승에서도 함께 있어야 한다니, 그게 허난설헌에게 위로가 되는 일인지 아닌지는 저로서는 알 수 없었습니다.

허난설헌의 작품 세계는 사후(死後)에 오히려 더 빛났습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 허균이 누이의 시고(詩稿), 즉 생전에 남긴 시 원고를 모아 보관하였고, 이것이 중국과 일본에까지 전해져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여기서 시고(詩稿)란 시인이 직접 쓴 시의 초고나 원고 묶음을 가리킵니다. 허난설헌의 경우, 정작 본인은 자신의 작품 대부분을 불태워 없애라고 유언했다는 기록도 있을 만큼 스스로의 삶과 작품에 대한 자괴감이 컸을 것으로 보입니다.

한시(漢詩) 창작에 능했던 그녀의 작품은 조선 문학사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여기서 한시(漢詩)란 한자로 쓴 정형시(定型詩), 즉 글자 수와 운율에 엄격한 규칙이 있는 동아시아 전통 시 형식을 말합니다. 여성이 이 장르에서 높은 경지에 올랐다는 것 자체가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몹시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출처: 한겨레 21에서도 허난설헌의 문학적 성취와 비극적 삶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옆 나라 일본은 연일 비와 태풍 소식이 들려오는데, 대한민국은 이토록 맑은 날씨가 이어지고 있으니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이 괜히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이 좋은 날에 묘소를 찾아 그녀의 삶을 한 번 더 떠올린 것은 저에게도 꽤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출처: 위키백과 허난설헌 항목에도 그녀의 생애와 작품 목록이 비교적 상세히 정리되어 있으니, 처음 접하시는 분이라면 참고해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요약: 경기도 광주 묘소는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었으며, 남편 김성립의 묘가 나란히 있었습니다. 허난설헌의 한시 작품은 사후 중국·일본에까지 전해져 더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허난설헌 묘는 어디에 있나요?

A. 경기도 광주시에 위치해 있습니다. 제가 직접 다녀왔는데, 묘소는 벌초와 정돈 상태가 꽤 잘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남편 김성립의 묘도 바로 옆에 함께 모셔져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Q. 허난설헌은 왜 요절했나요?

A. 정확한 사인은 명확히 전해지지 않지만, 자식들의 연이은 죽음과 불행한 결혼 생활, 오빠와 동생의 귀양 등 잇따른 불행으로 심신이 크게 쇠약해진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선조 22년인 1589년,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Q. 허난설헌과 허균은 어떤 관계인가요?

A. 허균은 허난설헌의 친동생입니다. 『홍길동전』을 집필한 바로 그 허균입니다. 허균은 누이가 세상을 떠난 뒤 그녀의 시고(詩稿), 즉 시 원고를 정성스럽게 모아 중국에 전하였고, 덕분에 허난설헌의 작품이 국경을 넘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Q. 허난설헌의 본명이 초희라는데 왜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나요?

A. 조선시대에는 여성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이 예법상 금기시되었습니다. 그래서 본명 초희 대신 호인 난설헌으로 불리게 되었고, '허난설헌' 또는 '난설헌 허씨'라는 표현이 정착되었습니다. 이처럼 호(號)는 당시 여성 문인을 지칭하는 사실상의 공식 명칭 역할을 했습니다.

 

결론

맑은 가을 하늘 아래 묘소 앞에 서서 저는 한 가지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허난설헌이 만약 지금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하는 질문입니다. 시문(詩文)과 서화(書畫)에 두루 능했던 여류 문인이 조선이라는 시대와 여성이라는 조건 때문에 그토록 비좁은 삶을 살아야 했다는 사실이 여전히 안타깝습니다.

허난설헌의 삶이 궁금하시다면 경기도 광주에 있는 묘소를 직접 찾아보시는 것을 권합니다. 텍스트로 읽는 것과는 다른 감각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생이 고스란히 담긴 공간 앞에 서보는 경험은, 제 경우엔 한참 뒤까지도 마음에 남았습니다.

 

참고: https://ko.wikipedia.org/wiki/%ED%97%88%EB%82%9C%EC%84%A4%ED%97%8C